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네딕토 16세 (문단 편집) === 유년기 === 1927년 4월 16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바이에른]][* 남부 독일은 루터교보다 가톨릭 교세가 강하다.] 지방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질서경찰]]이었고, [[티롤]] 출신의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아갔는데, 이런 집안 분위기를 따라 어린 라칭거도 가톨릭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1932년 이웃 동네 뮌헨교구의 대주교가 고향마을에 찾아왔을때, 5살의 어린 소년 라칭거는 대주교에게 꽃을 선사하는 화동으로 선발되었다. 이때 고급 승용차를 타고 마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것을 보고 이를 동경하면서 어린 소년 라칭거도 성직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때 친구들에게 "나는 커서 대주교가 될 거야"라고 이야기했다가 '''"차라리 교황을 하지 그러냐?"'''는 놀림만 받았다고. 1936년에는 영성체를 받았는데, 먼 훗날 교황이 되어서도 이 두 가지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하는 순간으로 회고하기도 했다.[* 이때 찾아온 뮌헨 대주교는 훗날 나치독일에 맞서는 미하일 파울하버 추기경이었다.] [[파일:external/i30.photobucket.com/YoungJoseph21.jpg|width=250]] 9살 무렵의 요제프 라칭거 [[파일:_65187712_65187711.jpg]] 히틀러 유겐트 시절의 증명사진. [[흑역사]]이기는 하지만 어릴 적에 [[나치 독일]]의 '''[[히틀러 유겐트]]''' 출신이라고 [[영국]]의 황색언론 [[더 선]]이 폭로한 적이 있고, 실제로 1941년에 가입해 유겐트 대원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에는 대공포대에서 복무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나치 독일]]에서 [[청소년]]들의 히틀러 소년단 가입은 자유 의사에 관계없는 '''필수이자 강제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징병제]]'''였기 때문에 소년 요제프 알로이지우스 라칭거에게는 선택의 여지 따위 없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학창시절에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강제 징집된 것과 같은 맥락인 셈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미래의 [[슈츠슈타펠|SS]]를 위한 인재 양성 및 예비 군인을 키우기 위한 청소년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러한 목적을 위해 창설한 것이 바로 히틀러 유겐트였다. 전쟁 직전이었던 [[1938년]]에는 모든 청소년 단체를 해산시키고 히틀러 소년단에 가입시켰다. 게다가 라칭거의 가족들은 아버지가 경찰에 근무한 것을 빼고는 [[나치]]에 그리 접점이 없었고, 아버지 역시 [[공무원]]이라는 직업적 특성상 어쩔수 없이 정부의 지시를 따를 뿐 나치에 대해서는 "신앙 교리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상부와 많은 마찰을 빚어 [[좌천]]도 잦았다. 가까운 친척형이 [[T4 작전]]에 휘말려 살해당했으며, 다른 친척들도 반나치 성향 때문에 [[다하우]] 수용소에 끌려가 처형당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전쟁이 점차 막장이 되어가던 [[1943년]]에는, 연합군 폭격기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독일]]을 맹폭격했다. 이 때문에 피해가 극심해지자 독일 국방군은 대도시에 대공포대를 증설하는데, 문제는 인력 부족이었다. [[남자]]라곤 1명도 남기지 않고 박박 긁어다가 죄다 전쟁터로 보내고 나니 대공포반 운용 요원이 부족했던 것인데, 때문에 [[여자]], 히틀러유겐트[* 이는 영화 [[다운폴]]에서도 나오는 부분이다.], 심지어는 '''[[소련군]] [[포로]]까지''' 대공포반 인력으로 동원했던 것이다. 유머로 "신사(예비역이던 남자들), 숙녀(여자), 어린이(소년단), 동무([[소련군]] 포로) 여러분~" 이라고 할 정도였다는 말도 있다. 앞서 알려진 가족 사정 외에도 애초에 미성숙한 나이에 강제적으로 복무한 것이기 때문에, 이 경력이 언론에서 크게 논란거리로 지적받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역시 [[일제강점기]] 때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로 강제 징집당해 [[일본군]] 으로 징집되어서 병사로 복무한 경력이 있지만, 강제이기에 친일인명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대공포반에서 라칭거는 초반에는 대공포 사수 역할을 하다가, 이후로는 각 포반별 연락을 맡는 통신병이 되었다. 이후 나치 독일의 패망이 임박하자 히틀러 유겐트 등 나치 조직도 흐지부지 되면서 라칭거 역시 조직을 이탈해 집으로 돌아가다 독일군 패잔병 색출을 나선 미군에 붙잡혀 수용소 생활을 하기도 했다. 미성년자임이 참작되어 귀가조치 된 후로는 여느 청소년 가톨릭 신자들처럼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 [[http://www.ratzingerfanclub.com/index.html|추기경 시절부터 존재했던 베네딕토 16세의 팬클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